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전통주의 가톨릭 (문단 편집) ==== 성 [[요한 마리아 비안네]] 인적 직할 서리구 ==== || Personal Apostolic Administration of Saint John Mary Vianney, PAASJV || [[https://www.adapostolica.org|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인적 직할 서리구]] 주로 [[브라질]] 캄포스 교구에서 활동하는 단체로서, 창립자는 공공연한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의 지지자로 이름이 알려진 안토니오 드 카스트로 마이어 [[주교]]이다. 한 때 [[성 비오 10세회]]와 마찬가지로 교황청과 화해하지 못한 단체였다. 창립자 안토니오 드 카스트로 마이어 주교(Bishop Antônio de Castro Mayer, 1904년 6월 20일 - 1991년 4월 26일)는 [[제2차 바티칸 공의회]]에서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 등과 함께 보수파 대의원들의 의견을 조율하고 이들을 대표하는 활동을 했다. 그는 성 비오 10세회 창립 전부터 [[마르셀 르페브르]] 대주교의 신앙 노선을 공개적으로 지지한 인물이었고, 1988년 [[마르셀 르페브르]] 대주교의 허가받지 않은 4명의 주교 성성식에 참석하여 파문당했으며, 1991년 르페브르 대주교와 비슷한 시기에 선종했다. 마이어 주교는 1948년 주교로 성성된 후 1949년부터 1981년까지 [[브라질]] 캄포스 [[교구]] 교구장이었는데, 1969년 새 미사 공포에도 불구하고 교구에서 새 미사 봉헌을 거부하고 그를 지지하는 상당수의 교구 사제들과 함께 [[트리엔트 미사]] 봉헌을 계속했다. 1981년 [[교황청]] 압력으로 교구장에서 물러난 뒤 자신을 지지하는 교구 사제들과 함께 성 [[요한 마리아 비안네]] 사제회(Priestly Society of Saint John Mary Vianney)를 창립했다. 후임 캄포스 [[교구]]장 [[주교]]가 새 미사 봉헌을 거부하는 그와 사제들에게 교구 시설 사용을 금지하자 독자적인 성당·공소·신학교 등을 건립하며 사목 활동을 강행했다. 교구장 퇴임 후 그의 사목 활동은 적지 않은 캄포스 교구민의 지지를 받았는데, 1991년 6월 그가 선종한지 2달 뒤 집전된 사제회 소속 리치니오 랭겔 신부(Fr Licínio Rangel)의 주교 성성식[* 이 주교 성성은 성 비오 10세회 4위 주교에 의해 집전되었다.]에는 교구청 불참 지시에도 불구하고 5만 명이 넘는 교구민이 참석했다. 2001년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회는 협상 끝에 교황청과 화해했으며, 사제회 소속 리델 신부가 [[콜롬비아]]의 다리오 카스트리욘 오요스(Dario Castrillon Hoyos) [[추기경]]에 의해 주교로 성성되었고, 사제회는 이름을 '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인적 직할 서리구'로 변경하였다.[* 카스트리욘 오요스 추기경은 성 비오 10세회에 대해서도 줄곧 "열교, 분파는 아니다"라며 일각의 과도한 낙인찍기를 경계하며 화해를 위한 대화에 힘써온 인물 중 한 명이다.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인적 직할 서리구는 [[성 베드로 사제 형제회]]와는 달리 자(自) 단체 소속 사제를 [[주교]]로 성성받을 수 있었다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